
읽는 것은 빌리는 것을 의미한다. 창작하는 것은 자기가 진 빚을 갚는 일이다. - 리히렌베르크 - 창작본거지는 http://bluecrys.lil.to/
by 비바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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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아주 빠른 속도로 도는데도 내가 어지럽지 않은 이유는, 지구가 아주 커다랗기 때문이란다. 그럼, 커다란 시련이 습격해도 내가 흔들리지 않으려면, 내 마음이 아주 커다래지면 되겠구나! 스팸 퇴치! Click Here!주의사항 모든 글은 무단펌, 무단도용을 금합니다. 정식으로 덧글+인용이나 트랙백은 허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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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용 짤방을 그리던 중이었는데 느닷없이 급습한 감기마에게 걸려서 호되게 곤욕을 겪느라 미처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크리스마스를 불과 몇시간 남겨두고 있는 지금에서야 느릿느릿 여러분께 기쁜 성탄의 인사를 올리는 주인장입니다. 아으, 이런 무례라니. 그저 하냥 저를 마구 쳐주세요ㅠㅠ 비록 감기마에 격침되어 제정신이 아니지만 저도 가족과 함께 나름대로 기쁜 크리스마스를 보냈답니다. 오늘 하루 쯤은 산타클로스가 찾아와주지 않는 어른들이라도, 현실에 짓눌려 희미해진 꿈에 가끔씩 슬퍼지는 어른들이라도 마음껏 사랑하는 사람들과 웃으며 지냈겠지요. 그리고 한 편에서는 크리스마스를 홀로 힘겹게 보내는 사람들을 위한 온정의 손길이 이어지고 있음을 느끼며 저도 세상사 시름을 잠시 잊어보았던 하루였습니다.
왠지 일자를 넘겨서야 크리스마스 짤방이 완성될 것 같은 느낌에 일자라도 넘기지 않으려는 발악을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길 바라며,(짤방은 완성되는 대로 이 포스팅에 덧붙여집니다'ㅂ'/) 크리스마스 뿐만 아니라 세세토록, 솜털같이 많은 이 찬란한 나날 마다마다 여러분들이 소망이 몽창몽창 이루어지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여러분, 메리크리스마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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짤방 올렸습니다.
이번에는 그동안 여러 사정으로 인해 수정명당 제 2 버닝스 커플로 등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실적이 미미했던 히하라 선배와 카호코 양입니다. 위 그림에는 사실 올리려 했었던 미니팬픽이 있었습니다만, 공책에 적혀있는 글씨들을 타이핑하여 올리기엔 너무 일자가 늦어버려서, 그것은 뭐, 나중에라도 엮인글로...(퍽!) 뭐 하나 할려면 꼭 탈이 나는 이 불운을 탓해야지요 뭐. 으흐흑(엎드러져 하냥 우옵네다)
가장 좋아하는 포즈인 백 홀딩...이건만, 여러분이 주목하셔야 할 것은 저 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요상한 식물입니다. 자, 눈치채주셔야 합니다. 무엇일까요? 그러어어엇씁니다! 저 요상한 크리스마스 식물은 바로 미슬토우. 미슬토우의 전설에 나오는 바로 그! 미슬토우! 누가 뭐래도 미슬토우. 그렇게 보이지 않는대도 주구장창 미슬토우. 애걔? 저게 무슨 미슬토우야? 하고 딴지거는 사람 전부 다 화성 구덩이에 메워놓고 끝까지 우기거늘 저것은 미슬토우!(매우 강조했다) 자, 두사람? 그렇다면 백 홀딩 말고도 미슬토우 아래서 만난 남녀라면 반드시 해줘야 하는 것이 있을텐데? 어렵지 않아. K로 시작해서 S로 끝나는거야. 저어어어언혀 어렵지 않아.(<-속에 꼬리 아홉 달린 여우가 들어 있다)
뭣하면 내가 포즈를 정해줄게. 일단 히하라, 뒤돌아 서있는 카호코를 네쪽으로 돌리기만 하면 돼. 어차피 목도리도 한가지로 되어 있고, 은근슬쩍 커플티고(아니 이건 관계없나) 처음부터 그렇게 그렸던 것도 다아~ 그 목적을 위해서이니 자, 어서 눈 맞추고 카호코는 까치발 세우고 히하라, 손은 카호코의 허리..삐삐삐삐삐삐!!!!.(그만, 나 더이상은 위험하다.-_-;) 으어? 크흠! 죄송합니다ㅡㅜ. 어쨌든 모두모두 행복한 날이었기를 바랍니다~'ㅂ'/ 다시한 번 메리메리 크리스마스~
2007년 12월 17일
젠장 불면증아. 내가 이번만은 너를 철썩같이 믿었건만, 내가 진짜 이번만큼 너를 간절히 바란 적이 없었건만, 아니 언제 바라기나 했었느냐 그런데 하필, 이번에 배신을 때리니, 불면증아! 중요한 순간에 초를 치다니! 아무래도 신께서 나같은 새심장 주제에 실시간 중계를 보면 심장마비 걸려 골로 갈 게 뻔하니 사전에 막아주시는 게 아닌가 생각까지 들 정도로 중계 시청 면에선 저주가 걸려있는 나. 내가 너무 밉다 연아야!ㅠㅠ 그래도 LP는 사수했다. 그 전까진 새벽 2시까지 버티다가 필름 끊기고 언제 되었는지 모르게 아침. 실속 제로였던 그 전과는 달리 그래도 정상적인 시간에 비정상적으로 미쳐있었던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이번에도 연아 양은 선녀 강림이었다. 항가항가. 시즌 베스트는 아니었더라도 사람들 눈에는 너의 연기가 최고였어. 더이상 입 아프게 강조할 필요도 없...지만 한 번 더 내 맘대로 강조하고프다. 최고는 너야!
정말 연아의 정신력은 여러 모로 정평이 나 있다지만 이번 대회에서는 특히 더 빛을 발하였던 것 같다. 괜히 여제가 아니지, 암. 트리플 룹 점프 때 꽈당 하는 거 보고 내 심장이 그냥 곤두박질치는 것 같았는데 연아 양의 진면목은 그 전의 실수를 까마득한 망각 속으로 던져버리는 그 후의 연기에서 드러난다. 클린은 클린인 대로, 제대로 여신급 퀄리티 강림 하시다가 가끔씩 '나도 인간이에요'라고 말해주는 듯한 미스조차도, 연아의 연기는 한 편 한 편이 각본없는 드라마다. 언니가 또 제일 좋아하는 드라마가 각본없는 드라마잖니ㅠㅠㅠㅠㅠㅠ. 어쩌면 연아 여왕님은 이 언니가 이토록 애정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것인가요ㅠㅠㅠㅠㅠㅠ. 룹 점프가 미스였다지만 - 그것도 스피드가 너무 빨라서, 연아의 컨디션이 몹시 최고라서 이루어진 미스였다 - 그 외 연아 특제 명품 럿츠 점프나 유난히 통 튀듯 하여 귀여웠던 살코 점프, 중계자들조차 감탄하게 만드는 이나바우어에서 이어지던 더블악셀 등 점프를 비롯, 스파이럴, 스핀, 스텝 시퀀스 등에서 악 소리가 날 만큼 멋진 연기를 펼쳐 준 덕분에 큰 것부터 시작해서 소소로운 가산점에 이르기까지 점수란 점수를 담뿍 챙겨가, 룹 점프로 인한 감점을 메우고도 남아 넘쳐, 드디어는 당당히 우승을 거머쥔 연아 덕분에 정말 다시 한 번 기뻤고, 연아가 최고라는 사실을 실감했던 하루하루였다. 남싱에서 랑비엘도 그렇고, 점프 미스에도 불구하고 노미스 클린 연기를 펼친 2위들을 5~6점이라는 큰 점수차로 따돌린 1위라니, 레벨이 정말 아득하구나. 장하다. 연아야 엉엉. 항간에서는 룹 점프 성공했으면 연아의 최종 점수 합계는 206~210점대로 세계 기록 갱신은 물론이거니와, 저기 안드로메다에 있는 레벨로 가버렸을 거라 한다. 그말 듣고 내 정신이 다 아득해졌더랬다. 그래도 어떻게든 인간인 채 살아가시려고 안간힘 쓰고 계신 연아 여신님. 훗. 하지만 사람들은 이미 다 알아버렸는걸. 당신이 여신이라는 것을. 언젠가 우리는 연아 여신님을 우주로 보내야겠죠?;ㅁ; 이 지구가 너무 좁아서 미안해. 연아양, 지못미!;ㅁ;
연아의 연기는 사람을 정신없이 빠져들게 하는 흡입력이 있다. 아, 언어가 나를 버렸어. 우리 연아의 연기에 이토록 진부한 표현밖에 붙이지 못하는 나라니, 그래도 아무튼 그런게 있다;ㅁ;! 그러니까, 동영상을 돌려볼 때, 시간이 없거나 다른 일을 하고 있을 경우 '다음에 봐야지이~'하고 잠시 중단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는가 하면, 도저히 중간에 끊을 수 없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이다. 연아의 연기는 당연히 후자의 경우. 뭐 다른 일 할려고 잠시 중단하면 그 중단한 시점에서부터 어쩐지 안절부절. 이것을 꼭 봐야만 할 것 같고, 안 보면 어쩐지 서운하고 막 그럴 것 같고 내가 애정이 없는 것 같이 느껴지고 막 그런다. 사실 그렇게 해서 플레이 들어가면 한 5~6번은 연속으로 봐주지 않으면 안되지 말입니다.(..) 게다가 보고 또보고 보다 보면 가끔씩 눈물도 나와.(ㅡㅜ) 아무튼 이번 그랑프리 파이널에서의 연기도 매우 그랬다. 쇼트, 프리, 갈라 뭐 하나 버릴 것이 없네. 그래서 저 위에 올린 동영상은 귀엽고 깜찍하고 매력적이고 예쁜...헉헉(아으, 설레발도 힘들다) 연아 양의 <Just a girl>갈라. 에잇, 나 혼자만 우주로 갈 순 없는 노릇이지 말입니다! 아무튼, 정말 행복했던 시즌이었다. 다시한 번 이런 찐한 감동을 전해 준 행복의 정수 연아 양에게 감사와 박수를. 정말 오서 선생님 말씀대로 행복한 스케이터가 되어 세상을 누벼주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그리고, 이번 그랑프리 1~6차와 파이널에 이르기까지의 프로그램을 지켜보면서 내가 꼭 언급해주고 싶었던 선수가 하나 있다. 바로 안도 미키 양. 정말 정직한 스케이터. 시즌 하나 말아먹을 각오를 하고서 강화된 룰에 맞추어 그 고치기 힘들다는 잘못된 점프, 플럿츠를 고치기 위해지금도 고군분투 하고 있을. 작년 월드 챔피언이 그런 각오 정말 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이번에 파이널에 진출하지 못했지만 나는 연아를 제외하고 다른 어떤 선수들보다 특히나 당신을 주목하고 있어요. 부디 몸 다치지 말고 다음 해 시즌에선 꼭 볼 수 있기를. 그리고 다른 스케이터들도 연아와 당신의 자세를 좀 본받았으면 좋겠어요. 사실은 지난 월드 챔피언쉽 때에도 당신이 주목을 받아야 했었는데 말이지요. 금메달을 딴 사람은 당신이었는데, 고국에서는 연아와의 라이벌 구도로 부각된 아사다 마오의 은메달로 인해 제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한 채 묻혀지고 말았지요. 난 당신이 언젠가 제대로 스포트 라이트를 한 번 받아봤으면 하는 작은 소망이 있어. 물론 연아가 나의 퍼스널베스트지만, 은메달 정도는 당신이 따주면 참 좋을텐데;ㅁ;/. 당신의 프로그램 스타일이 내 마음에 들고 들지 않고를 떠나서, 당신의 착하고 정직한 마음에 인간적으로 보내는 초보 피겨 팬 한 사람의 응원이에요;ㅁ;/
또... 아, 막 속상한 것이 딱 하나, 딱 한 선수, 이번 그랑프리 시즌에 있었는데. 지금은 시즌 끝난 직후라 과열되어 있으니 일단 접어두고 좀 잠잠해지면 그래서 마음에 병이 있는 사람들이 다른 쪽으로 좀 옮겨간 후에 언급하도록 해야겠다.
아무튼 결론은, 오늘도 연아 만세! 라는 것이다ㅠㅠ. 오 솔레 미오! 너 참 아름답다ㅠㅠ/
2007년 11월 19일
칵테일 바라는 곳은 연인들의 더없이 안성맞춤인 데이트 장소로 이용되기도 하지만, 혼자 앉아서 자신이 원하는 음료를 주문하는 사연 많은 사람들의 휴식 공간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홀로 온 손님들의 경우는 저마다 풀어놓을 이야기들을 하나씩은 가지고 들어오기 때문에, 이곳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바 텐더들은 그들의 넋두리나, 하소연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법을 알고 있었다. 말없이 들어주는 이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사랑과 이별, 그밖의 수많은 감정들로 냉가슴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칵테일 바는 더없이 좋은 위로의 장소였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즐겨 가던 칵테일 바에서 나는 그와 함께였었다. 원래 나는 선천적으로 알콜이 체질에 맞지 않게끔 만들어진 신체라서 그처럼 버본이나 진같은 강한 위스키가 첨가된 칵테일은 마실 수 없었다. 하지만 논 알콜 칵테일 중 하나인 레드 아이즈(Red Eyes)는 청량음료 같은 상쾌한 맛이 몹시 내 마음에 들어서 우리는 그곳에 자주 다녔다. 늘 앞에 한 잔씩을 시켜놓고 몇 시간이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밤이 깊어질 무렵에야 돌아가곤 했던 그때. 내가 술을 못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아직까지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칵테일 바에서 함께 하는 그와 나는 서로에게 무척이나 솔직했고, 어떠한 계산 없이도 서로를 바라볼 수 있었다.
지금 상태로서는 그 ‘솔직’마저도 감당이 되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항상 바에 자리를 잡자 마자 레드 아이즈를 주문하곤 했던 나에게 그간의 세월 동안 얼굴을 익혀 둔 바텐더가 다가와서 묻는다.
- 평소 것으로 하시겠습니까?
오늘따라 바텐더의 말투가 유난스레 조심스러운 것은 바로 나와 늘 함께 이곳을 찾아오곤 했던 동행의 부재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리라. 이러한 바 텐더들의 센스가 사람들로 하여금 가슴 깊숙이 숨겨둔 이야기까지 끌어낸 다는 것을, 이들은 과연 알고 있을까?
- 아니요, 오늘은 다른 거 한 번 마셔 볼래요. 근데 내가 늘 마시던 거 외엔 경황이 없어서 추천을 좀 받아야 할 것 같은데요. - 알코올이 필요하신가요?
내 얼굴 드리워진 그림자를 보았을까. 그와 함께 왔을 때 이미 내 성향을 파악하고 있었을텐데 평소에 없는 말을 묻는 것으로 보아서 분명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부정할 일도 아니었다. 나는 그와 헤어졌다. 헤어졌기에 그와 늘 함께 왔던 여기를 종착역으로 이 좋은 토요일 저녁에 열없이 거리 속을 맴돌았던 것이다.
- 네. 그래도 좀 순한 것으로 주시겠어요? 조금만 마셔도 핑 도는 체질이라서요.
바텐더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로 칵테일 제조에 들어갔다. 재료가 들어있는 선반 위를 부지런히 왔다갔다 하는 바 텐더를 은연중에 눈으로 쫓다가, 어느덧 시선이 왼손의 약지에 머물렀다. 그와 헤어진 직후에 빼버렸던 2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약손가락. 반지가 머물렀던 곳만 살빛이 미묘하게 다르고, 자세히 보면 작은 긁힘 상처까지 있다. 성급히 빼야 했다. 그의 얼굴을 향해 던져야 했으니까.
2년이라는 세월은 본인들은 의식하지 못해도 다른 사람들에게 보기엔 상당히 긴 세월이었던 것 같다. 몇 번의 기념 파티도 했었고, 많은 사람들의 축하도 뒤따랐다. 100일 기념 파티에서는 그가 왕자라도 된 듯이 내 손등에 키스를 하며 반지를 끼워주었다. 하지만 그때의 그 추억마저 지금에 와서는 상처 입은 마음을 질식시킨다. 그토록 우리는 뒷맛 나쁘게 헤어졌다.
이것저것 상념에 젖어있는 나의 앞에 붉은 색의 음료가 담긴 잔 하나가 놓였다. 레드 아이즈? 아니다. 색깔이 좀 더 옅은, 부드러운 느낌의 색이다.
-이것 이름이 뭐예요?
고개를 들어 묻는 나에게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보이며 바 텐더가 대답했다.
-도화(桃花)라는 칵테일이지요. -도화? -복숭아 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구나,‘도화’였구나. 딴 것들은 전부 영어투성이인데, 이것만 왠지 동양적이네요. -네, 그래서 오히려 찾으시는 손님들도 많더라구요. -……예쁘네요, 이름.
스트로우를 입에 물고 한 모금을 마셔 보았다. 상큼한 맛은 레드 아이즈와 다를 바가 없었지만, 좀 더 부드러웠다. 끝에 가서 퍼지는 미미한 알콜의 맛이 조금은 쌉쌀했다. 나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몇 모금 마시지 못하고 다시금 이것저것 떠오르는 바람에 차가운 잔의 겉에 수포가 생겼을 무렵, 바텐더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 오늘은 동행이 안오셨나 보죠?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처음에 언급했던 사연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도록, 이렇게 바 텐더가 넌지시 내어 놓는 언질은 일종의 신호탄이 되어 준다. 실제로 바를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신호탄을 들으면 보다 솔직해진다. 은근슬쩍 마음 보따리를 풀어놓고 싶어서 기다리기도 한다. 예외 없이 나 또한 그 무리들 중 하나였음을 인정한다. 누구라도 좋으니 말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해서 오는 이곳. 나는 순순히 작은 부분부터 실토해 나가기 시작했다.
- 오늘 뿐 아니라 영원히 안 올거에요. - 어디 갔나 봐요? - ……네, 맞아요. 어디 갔어요. 내가 마음속에서 영원히 보내버렸거든요.
별로 당황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심하지도 않은 표정. 아마 이런 이야기들만 일주일에도 서너 번은 기본으로 들었으리라. 그런데 이런 바텐더들이 자신이 들어주는 이들의 이야기와 같은 이별을 겪으면 어떻게 할까? 쓸데없는 궁금증이 떠올랐다.
- 어디든지 가 버리라죠. 어차피 여기까지였던 것을, 자존심 상하니까 내가 먼저 찼어요. 후후, 그 얼빠진 표정을 봤어야 하는데.
누가? 라는 내면의 물음이 이어졌지만 나는 조용히 무시하기로 했다.
- 도화…라고 했던가요? 이거 이름이?
대답은 없지만 경청하고 있는 느낌이 분명히 전해온다. 이미 내 물꼬가 터졌다는 것을 눈치 채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또한 이 바텐더와 비슷한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는 듯 하면서 나중에 보면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다 듣고 다 기억하고 있는. 히어링 센스는 기막히게 좋았다. 그것이 매력이랄 수도 있었다. 아니, 가장 치명적인 매력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그것 때문에 사람 여럿 울렸으니.
- 사주 용어 보면 도화살이라고 있는데, 알고 있어요? 뭐 댁은 별의 별 소릴 다 들었으니 이미 알고 있다 치고. 그 사람, 그거 들렸던가 봐요.
사람이 많이 꼬이는 스타일이었다. 그는. 처음엔 그리 잘나 보이지도 않고, 특출나게 내세울 것도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은근한 친밀감을 풍기며 도드라지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오랜 친구도 많고, 스쳐 지나가는 사람도 한 번의 연락으로 그치는 법이 없었다. 소위 말하자면 만인의 신사였고, 만인의 친구였다. 그것이 문제였다.
- 나쁜 자식이, 양다리도 열받아서 죽네 사네 하는 판에, 문어발을 걸치고 있었다는 거 아니에요. 나 말고 네 명인가, 더 있었다는데. 나도 정신이 빠졌죠. 그런 녀석과 2년을 붙어다녔으니.
‘도화’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역시 상큼하고, 달콤하고, 쌉쌀한 맛. 왠지 그와 닮은 칵테일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난 이제껏 레드 아이즈가 그와 닮았다고 느꼈다. 상큼하고, 달콤한 맛. 도화의 ‘쌉쌀함’을 뺀 맛. 그저 달콤하기만 했다. 그때의 나는 철이 없었던 걸까.
엄밀히 말하자면 그 스스로가 다른 사람에게 접근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아주 작정하고 다른 데로 눈을 돌리는 사람이냐 하면 분명히 단언컨대, 그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잘못이 없느냐 하면 그것도 단언컨대 분명히 아니다. 그의 잘못. 그건.
- …그 사람, 몰려드는 사람 딱 잘라서 거절 하는 법을 몰랐어요.
모두 받아주는 사람이었다. 그런 매너도 세상에 없다 싶었는데, 오히려 그것이 걸림돌이 될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사람 좋다고만 생각했다. 이런 사람 없겠지, 했다. 한결같이 지키는 매너만큼 사랑도 지킬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속단이었을까? 나는 분명히 그의 눈에서 사랑을 보았고, 따뜻함도 보았는데, 그와 나를 이별로 내몬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이제껏 듣고만 있던 바텐더가 한 마디 했다.
- 많이 사랑하셨군요.
순간, 유리잔의 겉면을 의미 없이 손가락으로 쓰다듬고 있던 나의 움직임이 멎었다. 듣고도 귀를 의심할 정도로 내 마음에 무엇인가 충격이 온 것은 그 한 마디의 무게가 예측하지 못한 날카로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말의 이면에 투영되는 또 다른 진실. 나는 눈을 감았다.
왠지 그와 나를 이별의 풍파 가운데 선 연인으로 만든 원인이 사랑해서라는 지극히 모순적인 생각이 들었다. 사랑을 잃은 것이 사랑 때문이라니, 될 말인가.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사랑이었는데, 사랑을 잃은 것이 오히려 사랑했기 때문이라니, 될 말인가. 사랑했기로 헤어진 거고, 헤어진 것도 또 사랑이란다. 정말 그렇게 되면 나는 엉뚱하게도 내가 제일 싫어하는 신파조의 여주인공이 되어 버리는 거잖은가. 내가 제일 어리석다 하였던, 한없이 졸렬한 이유로 자신의 불합리를 메우기에 급급한 그런 여자가 되 버리는 거잖은가. 그건 아니다. 그래선 안되는 거였다. 강해지는 자기변호에 어느새 힘이 들어가 있던 손에서 유리잔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리고 이어서 찾아오는 허탈감. 갑자기 힘이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알콜 기운이 벌써부터 몸속에서 나도는 것일까, 나는 힘없이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 그랬었던가요?
차라리 사랑 그 자체까지 부정해버리고픈 마음이 싹튼다. 그래서 내가 이 치졸한 생각을 면할 수 있다면. 그런데 가차 없이 사람 좋은 미소로 바텐더는 나를 파장 속으로 몰아넣었더랬다.
- 너무 많이 사랑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불안해지기도 하지요. 어떤 손님이 그러셨죠. 어떤 사람을 사랑했는데, 그 사람과 사랑하게 되고 보니 어느새 겁쟁이가 되어 있더래요. 사랑을 하면 전부 겁쟁이가 된다나요. - 와, 오늘 말 많이 하시네. 바텐더가 그래도 되요? 그냥 적당히 상대하다가 돌려보내라고 매니저 되시는 분이 딴지 걸면 어쩌려고요?
은근히 분해서 찔러 보지만, 시치미를 떼고 답하는 ‘바텐더’.
- 뭐, 이래봬도 말 하는 거 좋아합니다만. 고객을 대하는 최선의 서비스라고 답하면 됩니다. - ……푸훗. 아하하하하.
한 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주위 사람들이 나를 보건 말건, 그냥 웃음이 나왔다. 졌다. 항복이었다.
지레 겁을 먹은 것은 나였었나 보다. 그래서 더 아팠던 것도 나였었나 보다. 나는 사랑이 사랑을 물리쳤다는 것을 믿기 싫었고, 그리도 거부하려고 억지로 따라붙는 그를 밀어냈었다. 그에게 그 간의 추억까지 전부 다 가져가라고 소리소리 쳤다. 그의 곁에서 어느새 나의 자릴 조금씩 차지하고 있던, 아니,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고 네 마리의 여우들과 당당히 맞설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겁쟁이였던 것이다. 내가.
- 혹시, 점쟁이 아니에요? 일부러 ‘도화’ 추천한 것도 그렇고.
그는 대답 없이 미미한 자부심이 깃든, 그리고 그것 이상으로 의미심장한 무엇인가가 스며 있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다시 한 번 낮은 웃음이 터져 나왔고, 나는 굳이 그 웃음을 참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래서 바텐더들을 싫어한다. …이래서 바텐더들을 좋아한다. 밤이 아무리 깊어도 연인들의 도란도란 얘깃 소리가 끊어질 줄 모르고, 아름다운 모던 클래시컬한 조명이 은은하게 내리쬐는, 그러다가 한두명은 혼잣 웃음을 짓고, 몇몇은 이야기보따릴 풀어놓다가 조그맣게 웃거나, 코를 훌쩍이거나 흐느끼기 시작하는 그런 칵테일 바를 사랑한다.
- …사랑…했던가요…….
한 바탕의 웃음을 멈추고, 나는 그 미량의 알콜에도 취기가 돌기 시작하는 몸을 가누면서 조용히 속삭이듯 말했다.
- ……. - ……네, 그랬나 봐요. 그저 그 사람 보는 것이 좋아서 그 사람 일하던 바에서 몇 시간이고 앉아 있었던 것이 사랑이라면, 그 당시 내가 마신 칵테일 이름도 모르고 무작정 추천받은 거라고 이거,‘도화’를 홀짝이고 있었던 것이 사랑이라면, 컵 받침대 밑에 조용히 밀어 넣은 쪽지가 받아들여져서 낮에 그가 일하지 않을 적에 몇 시간이고 함께 했던 것이 사랑이라면, 그래서 그가 바를 그만둔 뒤에도 함께 칵테일 바를 찾아다니며 그에게 칵테일에 대한 설명을 세상 그 누구보다 열심히 듣곤 했던 것이 사랑이라면, 나한테 알콜은 맞지 않는다고, ‘도화’처럼 상큼한 맛인데 알콜을 넣지 않은 것도 있다며 이 ‘레드 아이즈’를 추천했던 그의 배려에 어린 아이처럼 행복해했던, 그래서 ‘레드 아이즈’만 마시곤 했던 그것이 그리도 절실한 사랑이었다면……. - ……. - 나는…그를……너무 많이 사랑했었던가 봐요…….
뭔가 뜨뜻한 것이 볼을 흐르기는 하는데, 닦을 수가 없었다. 그 쌉쌀함은 알코올의 풍미였기로, 눈물을 자아내는 것을 미처 생각지 못했다. 왜 그러잖은가, 사랑을 하는 사람은 감상적이 되어 놓아서, 조금의 술기에도 금방 울음을 터뜨릴 수 있다는 것 말이다. 내가 처음부터 그와 함께 조금씩이나마 도화에 길들여졌더면 지금 이 순간 와서 울지 않을 수 있었을까? 아무래도, 나는 무엇인가를 크게 착각하고 있지 않았나 싶다.
앞에서 조용히 보고만 있던 바텐더는, 가만히 서비스로 ‘도화’를 한 잔 더 만들어 채워주었다. 내가 마시던 도화는 얼음이 전부 녹아버려서 더 이상 맛이 없다며.
그날 따라 칵테일 바에는 연인들이 많았다. 청승맞게 바에 엎드려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려대는 여인네가 그들에겐 어떻게 보였을지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 중에서도 나와 같은 이가 나올 수 있으며, 지금은 내 차례라는 것이었다.
아무렴 어떤가, 그 전에도 이런 경우가 있기는커녕 많았을텐데. 다시금 그들의 회화로 돌아가는 두런두런한 소리를 들으며, 나는 눈물을 삼키고 다시 도화의 잔을 입에 털어넣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이 ‘도화’는 앞의 ‘도화’보다 좀 더 달콤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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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 20일 금요일 점심에 쓰다. 2007년 11월 19일 월요일 새벽에 수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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